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마태복음 4:12]
& 하나님의 때!
찬송가 384 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오늘도
예수님의 보호가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셔서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십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느냐고
하소연하고 불평을 하여도
예수님의
보호하심은 여전하십니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보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고 하소연하며
불안해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기의 백성을 언제 어디서나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외면하거나
거들떠 보지 않으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해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보호하심이
크고 놀라운 하루를
경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이
체포당한 소식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4장12절 부터 시작되는
갈릴리 사역은
곧 바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 사건들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는 여기서
아무런 시간적 연결 관계를
밝히고 있지 않으나,
예수의 세례와 시험 사건은
A. D. 26년경에
있었던 것으로,
본 단락의 갈릴리 사역과는
약 1년 정도의
간격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줄곧 갈릴리에
계셨던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활동하고
계셨음을 시사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잡혔음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신 사건이
기록된 앞단락(1-11절)은
예수의 속죄사역
시작을 위한
준비 사역에 대한 기록입니다.
반면 본 단락부터는
예수의 속죄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속죄 사역에 대한 기록을
세례 요한의 체포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시험을 받으신 후
유대 지역에서
얼마 동안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 1:29; 4:42).
그후 세례 요한의
체포 사건 이후에
유대에서 갈릴리로
옮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를 비롯한
마가와 누가와 같은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을 생략한 것은
예수의 갈릴리
사역에 보다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잡혔음’은
‘주다’를 의미하는
의역어로 사용된 단어로서
‘(다른 사람의)
손안으로 넘겨 주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에서는
주로 ‘권력 기관에
사람을 넘겨 주는 것’(막 13:9),
‘대가를 받고 사람을 파는 것’
(마 26:2)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부정과거 수동형으로 쓰여서
요한이 권력 기관,
즉 헤롯왕의 손아귀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사는
본서 마태복음 14장3절 이하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은
세례 요한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부정을
비판한데 원한을 품고
왕실의 감옥에
잡아넣었습니다.
그리고 ‘들으시고’로
본문에서는
시간적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는
요한이 옥에 갇혔다는
사실로 인해
갈릴리로
가신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시간적인면으로 볼때
요한이 옥에 갇힌 사실을
들으신후에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의 잡힘과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며,
단지 시간적으로
요한이
잡힌 후에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언급은
당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세례 요한이 퇴조하며
동시에
예수의 사역이 부각됨을
보여 주는 기능을 갖습니다.
본문과 병행 구절인
막 1:14은
‘요한이 잡힌 후’라고
기록함으로써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하였습니다.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물러가셨다가’는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다’,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다’는 의미인데,
2장 12에서는
‘돌아가다’로
그리고
2:13,14,23에서는
‘떠나다’는
의미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고향 갈릴리 지역으로
다시 돌아가신 것을 가리킵니다.
한편 한글 성경으로 보면
본절과 제13절이
연결된 문장으로서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그곳에 있는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신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실제로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이 성장하신
나사렛을 비롯해서
첫사역지인
‘가버나움’을 포함한
팔레스틴 북부 지역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와 가버나움이
별개의 지역이란
오해는 불식되며,
13절은 본절에 대한
부연 설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이곳은
당시 정치 · 경제 ·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유대 지역보다는
외부적 방해를 덜 받으며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하시는 시기는
자신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임의로
모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물러날 때가 있던지
시작할 때도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쏟아부을 때가 있는가 하면
쏟아부은 것을
거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준비를 한 것이
성장하고
어느 일정 시간이 지나서
거두고 열매를 반드시
맺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로
성경에서는
언급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 인간이
다 해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물러가시지
않았음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예수님이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중에 또 사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연약하고
무지하여서
모든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아니
하나님의 생각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길과
우리가 원하는 길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기때문에
당장은 잘 모릅니다.
인간이
아무리 기고 날라도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길은
감히 비교조차 하기가 힘듭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어느 싯점이 오게 되면
그 때 그래서
하나님께서 막으셨고
다르게 이끄셨구나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인간인
우리는 잘 모릅니다.
어제도 몽골 선교 2차팀
두 명의 목사님이
몽골에 들어갔습니다.
율법완성 9장부터 16장까지
가르치기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한 분은
입국 심사에서 통과하여
일정상
어제부터 강의를 하였고
또 한 분은
입국 심사에서 거절을 당하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갔다가
울란바타르 공항에서
몽골에 입국하지 못하고
인천 공항으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생겨난 것일까요?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릅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어찌 된 일이죠하며
계속해서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생각하신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은 분명히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생각이
이 것이었다고 나중에
확인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아무튼 모든 것에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갈릴리로 예수님도
물러가실 때가 있기도 하고
갈릴리에서
나오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도 있지만
곤경에서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시다고
다 전진만 있고
직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다 순조롭게 다 진행이 되고
막힘도 없고
직진만 있는 인생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잠잠히 기다리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가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때가 되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반드시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여라도
전진하거나
직진하지 못하고
뒤돌아온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만사에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때는
가장 우리에게
적절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깊게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때에
가장 적합한 길로
인도해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기를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오직 예수님!
2024.4.23.화 그인 김홍재목사